이해받지 못할 말들의 조그만 어휘집 (제1부)
enzoy : 쇠털나날/레져&아르트&여행 : 1998/06/01 23:36밀란쿤데라씨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등장인물인 사비나와 그의 새 애인 프란츠 둘 사이 틈의 단어장이지요. (민음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부: 이해받지 못할 말들. pp104-112)
여자
여자라는 것, 사비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녀가 선택하지 않은 하나의 조건이다.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은 장점이나 실패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강요된 상태와 대면할 경우 이에 대응할 적절한 태도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 사비나의 생각이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그녀에게 부조리해 보였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어느 날, 프란츠는 이사한 말투로 "사비나, 당신은 여자예요."라고 했다. 그녀는 그가 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을 방금 발견한 콜럼버스의 비장한 말투로 이 소식을 그녀에게 전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나중에야 그가 과장된 어투로 발음한 여자라는 단어가 인류의 두 성별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여자가 여자라고 불릴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츠에게 있어서 사비나가 여자라면 그의 진짜 부인인 마리클로드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두 사람이 알기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난 당시), 그녀는 그에게 버림을 받는다면 자살하겠다고 그를 협박했었다. 이 협박이 프란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리클로드가 마음에 그리 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사랑이 숭고하게 여겨졌다. 그는 자신이 이토록 위대한 사랑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 사랑 앞에 아주 낮게 머리를 조아려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땅바닥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가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던 순간만큼 강렬한 감정을 그에게 보여준 적은 이후로 한번도 없었지만, 마리클로드에게 결코 아픔을 주지 않고 그녀에게 내재된 여자를 존중하리라는 다짐은 그의 마음속 깊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이 문장은 묘하다. 그는 마리클로드를 존중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마리클로드에게 내재된 여자를 존중한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마리클로드 자체가 여자인데, 그가 존중해야만 하는 그녀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여자란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여자에 대한 플라톤적 개념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다. 그의 어머니를 통해 그가 존경하는 것이 여자였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지, 어머니에게 내재된 어떤 여자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 여자에 대한 플라토닉한 개념과 그의 어머니는 동일한 것이었다.
프란츠의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어느 날 문득 어머니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은 그의 나이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였다. 프란츠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의심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평범하고 차분한 말투로 비극을 감추었다. 시내를 한바퀴 돌자고 아파트를 나오는 순간, 프란츠는 어머니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당황했고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두려웠다. 그는 어머니의 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두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걸어야 했다. 그가 고통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조와 배신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묘지로 그녀를 데려가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의 회상속에서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 때문에 그는 정조가 모든 덕목 중에 으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 삶이 통일성을 부여하며, 그것이 없다면 우리 삶은 수천 조각의 덧없는 인상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자주 했고 아마도 그것은 무의식적인 속셈에서였을 것이다: 사비나가 정조에 대한 그의 태도에 매료될 것이며, 그것이 그녀를 붙잡아 두는 수단이라는 속셈.
그런데 사비나를 유혹하는 것은 정조가 아니라 배신이었다. 정조란 단어는 일요일에 숲너머로 지는 태양이나 화병 속의 장미다발을 취미삼아 그리던, 청교도적이며 시골 냄새를 풍기는 그녀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했다. 아버지 덕분에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다. 열네 살 때 그녀는 동갑내기 아이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기절초풍하여 1년 동안 그녀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에게 피카소의 복제화를 보여주며 큰소리로 웃었다.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를 사랑할 권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입체파를 사랑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라하로 떠나면서 마침내 그녀의 집안을 배신할 수 있으리라는 뿌듯한 느낌을 가졌다.
배신.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학교 선생님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그녀는 미술 대학에 등록을 했지만 피카소처럼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것이 의무적으로 그려졌고, 미대에서는 공산주의 국가 우두머리의 초상화를 만들어 냈다. 공산주의는 사랑(그 시대는 청교도적 분위기 일색이었다)과 피카소를 금지하는 또 다른 아버지, 한결같이 가혹하고 완고한 아버지였기에 아버지를 배신하고자 하는 그녀의 욕구는 충족되지 못했다. 그녀가 프라하 출신의 싸구려 배우와 결혼한 이유는 오로지 그가 기인이라는 평판을 받았고 두 아버지가 그를 마땅치 않게 보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었다. 다음 날 매장을 하고 프라하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전보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슬픔에 겨운 나머지 자살한 것이다.
그녀는 회한에 사로잡혔다: 아버지가 볼 때, 화병의 장미를 그리고 피카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토록 잘못된 일이었을까? 열네 살짜리 자기 딸이 임신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그토록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을까? 부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조롱거리가 될 구 있을까?
그녀는 다시 배신하고픈 욕구에 사로잡혔다: 자기 자신의 배신을 배신하기.
그녀는 남편에게(기인이라기보다는 거추장스러운 주정뱅이로만 보이는) 그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A와 화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혼한 여자 예술가의 삶은 배신당한 그녀 부모의 삶과는 닮지 않았다. 첫 번째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음악
프란츠에게 음악은 도취를 위해 창안된 디오니소스적 아름다움에 가장 근접한 예술이다. 소설이나 그림을 통해서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도취하기는 어렵지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바르토크의 두 개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면 취할 수 있다. 프란츠는 위대한 음악과 가벼운 음악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는 이러한 구별은 위선적이며 케케묵은 장난이었다. 그는 로큰롤과 모차르트를 똑같이 좋아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해방을 뜻했다: 음악은 그를 고독과 유폐, 도서관의 먼지로부터 해방시키며 육체의 문을 열어 그를 통해 영혼이 빠져나와 타인과 교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사비나가 그와 더불어 이러한 춤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들은 함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리드미컬한 소란스런 음악이 그들의 식사에 곁들여졌다.
사비나가 말했다:
"이건 악순환이에요. 음악을 점점 크게 트니까 사람들은 귀머거리가 되요. 그런데 귀머거리가 되니까 볼륨을 높일 수밖에 없지요."
"당신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나요?
하고 프란츠가 물었다.
"네"
하고 사비나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혹시 다른 시대에 산다면 몰라도......"
그리고 그녀는 음악이 눈덮인 웅장한 침묵의 들판에 활짝 핀 한 송이 장미와 흡사했던 요한-세바스찬 바흐의 시대를 생각했다.
음악이란 가면을 쓴 소음은 젊은 시절부터 그녀를 쫓아다녔다. 미술학교의 학생 시절에 그녀는 당시 청년 작업장이라 불리던 곳에서 방학을 보내야만 했었다. 젊은 학생들은 집단 가건물에 수용되어 제련소 건설공사에 참여했다. 아침 5시부터 밤 9시까지 확성기는 악을 쓰는 듯한 음악을 토해냈다. 그녀는 울고 싶었지만, 음악은 경쾌했고, 도처에 확성기가 있어서 화장실에서나 침대담요 속에서도 그녀는 음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음악은 그녀 뒤에 풀어놓은 개떼 같았다.
그때 그녀는 공산주의 세계란 이러한 음악의 야만성이 군림하는 유일한 곳이라 생각했다. 나라 밖으로 나가보았을 때, 그녀는 음악의 소음화가 인류를 총체적 추함이라는 역사적 단계로 밀어붙이는 세계적 과정임을 확인했다. 추함의 총체적 성격은 우선 도처에 편재된 음향적 추함으로 발현되었다: 자동차, 오토바이, 전기 기타, 파쇄기, 확성기, 사이렌. 시각적 추함의 편재도 이에 뒤질세라 나타났다.
그들은 식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가 사랑을 했다. 그리고 막 잠이 들려는 프란츠의 머리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혼미하게 뒤섞였다. 그는 레스토랑의 요란스런 음악을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소음에도 좋은 점이 하나가 있다. 단어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말하고, 쓰고, 강의하고, 문장을 만들어내고, 공식을 찾고, 그것을 수정하다보니 나중에 가서는 어떤 단어도 더 이상 정확하지 않고 그 의미가 희미해진 채 내용을 상실하여, 남은 것이라곤 부스러기 껍질, 먼지, 모래가루뿐이었다. 그런 것들은 그의 뇌 속에서 부유하고 두통을 일으키면서 그의 불면증, 그의 병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고통, 허영심, 무의미한 단어가 영원히 침몰하는 거대한 음악, 모든 것을 감싸고 품에 안아 질식시키는 절대적 소음, 아름답고 경쾌한 소란을 막연하지만 강렬하게 원했던 것이다. 음악, 그것은 문장의 부정이며, 음악, 그것은 반언어이다! 그는 사비나를 오랫동안 포옹하고 단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으면서 음악의 난잡한 소란과 더불어 희열이 넘쳐 흐르도록 만들고 싶었다. 이러한 행복한 상상의 소음속에서 그는 잠들었다.
빛과 어둠
사비나에게 산다는 것은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시야는 두 개의 경계선에 의해 제한된다: 눈을 멀게할 정도로 강렬한 빛과 완전한 어둠. 아마도 모든 극단주의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은 이런 데서 연유할 것이다. 극단적인 것은 그것을 넘어서면 생명이 끝나는 경계선의 표시이며, 정치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 극단주의에 대한 열정은 죽음에 대한 위장된 욕망이다.
프란츠에게 빛이란 단어는 부드러운 햇살이 감싸는 풍경의 이미지가 아니라 빛 그 자체, 태양, 전구, 영사기 같은 빛의 원천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익히 들어오던 메타포(타자주: 은유?)를 떠올렸다: 진리의 태양, 이성의 눈부신 광채 등등.
그는 빛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꼈다. 요새는 정사를 하기 위해 불을 끄는 것은 웃기는 짓으로 통한다: 이것을 알고 있는 그는 침대머리에 조그만 램프를 켜두었다. 하지만 사비나의 몸에 진입하는 순간 그는 눈을 감는다. 그를 사로잡는 관능이 어둠을 예고했던 것이다. 이 어둠은 순수하고 총체적이다. 이 어둠에는 이미지도 환영도 없으며, 끝도 경계선도 없다. 이 어둠은 우리들 각자가 내면에 품고 있는 무한성이다. (그렇다. 무한한 것을 찾고자하는 자는 눈만 감으면 된다!)
쾌락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프란츠는 온몸을 활짝 펼치고 그의 영원한 어둠 속으로 녹아 들어가 그 자신이 영원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내면적 어둠에서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외양은 점점 위축되는 법이다. 눈을 감은 남자는 자기 자신을 폐기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불쾌한 일이며, 그래서 사비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아 자기도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어둠은 무한성이 아니라 다만 그녀가 보는 것과의 불화, 보여진 것에 대한 부정, 보는 것의 거부만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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