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사랑
enzoy : 쇠털나날/레져&아르트&여행 : 1998/06/04 23:36<마음을 잃어버린 남자와 기억을 잃어버린 소녀의 사랑 이야기...> 랩니다. 언제 읽어봐도 눈물이 철철 나는 얘기... 하이텔 PC통신 시절에 펐던 글인데, 원작자분이 누군지 남아있지 않아 기재를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작가분이 누군지 알게되면 식사대접 함 해드리고 기재하겠습니다.
1.
고독...
사람들은 고독할 때 외로움을 느끼고 세상에서 소외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로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반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세상에서 소외되는 느낌을 갖는다.
'빌어먹을...'
형준은 어두룩해진 산길을 헤치며 길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등산을 간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 많은 사람들...수많은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 오르는 틈바구니에 끼어 같이 산을 오르다 숨이 막힐 것같은 질식감으로 등산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었다. 산에서 내려오던 도중 그는 샛길로 빠지는 길을 발견하고 그길로 들어섰다. 어느 정도 올라가자 더이상 길이 안나왔지만 그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도 더이상 보이지 않았고 반드시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의욕도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조용히 자연을 느끼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후로 형준은 왠지 모를 이유로 가끔씩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아려올 때 마다 아무 산이나 사람들이 적고 이미 폐쇄된 등산로를 따라 어느 정도 올라가서는 중턱쯤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멍하니 앉아서 허공을 쳐다보다 날이 어두워져 산길을 헤메게 된 것이었다.
'도대체 여기가 맞는 길인가...?'
형준은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항상 후랫쉬를 가지고 다녔다.그러나 그가 올라갔던 길은 이미 오랫동안 사람들의 출입이 없었던 길이라 풀과 나무들이 울창해서 밤에는 제대로 길을 잡을 수 가 없었다. 겨우겨우 길을 찾아낸 형준은 조심해서 산길을 내려와 자신의 차가 있는 곳까지 안전히 이르렀다. 시동을 켜고 도로 앞으로 나가려던 순간 이상한 물체가 도로 옆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형준은 차에서 내려 그 물체로 향해 다가갔다.
'귀찮게 됐군...그냥 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 물체를 본 형준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물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옷이 다 찢어지고 머리에는 큰 상처가 있어 피가 근처를 흥건히 적셔 놓고 있었다. 형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본 사람이 없으면 못 본 것처럼 지나쳐갈 생각이었다. 그 시체는 나이 열 아홉 정도 되보이는 여자로 아직 소녀같은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뺑소니차에 치어 저렇게 되었을 것이다. 예전의 누구처럼...
'아무도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형준은 만약 자신이 신고를 할 경우 경찰서에서 계속 오라가라 하며 복잡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자신의 차로 돌아가 그냥 떠날 마음을 먹었다. 자신이 아니라도 아침이면 누군가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린 나이인데 불쌍하군....'
약간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차로 발길을 돌리려 하였다.
'꿈틀'
그때 시체가 약간씩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형준은 시체가 꿈틀거리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직..살아있었나..?'
생각해 보니 죽은 듯 누워 있어서 죽은 시체라고만 생각했지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확인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다면 귀찮기는 하겠지만 병원까지 데려가야 했다. 아무리 사람들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부상당한 환자를 못본 척하고 갈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준은 그 소녀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보았다. 맥박이 미미하기는 했지만 뛰고 있자 그녀를 안아 들고 자신의 차 뒷 자석에 눕혔다.
"으음.."
소녀가 신음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형준을 보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쳤다.
"끼-악!"
"조용히 해!"
형준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소녀를 보고 신경질이나 화를 내듯 말하자 소녀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몸을 오돌오돌 떨며 웅크리다 자신의 옷이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소녀는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찢어져있는 옷깃을 잡아 여몄다.
"자, 이걸 입어..."
형준은 츄리닝 한 벌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등산을 하다 옷이 찢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항상 운동복 한 벌씩을 여벌로 가지고 다녔다. 소녀는 못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보자 형준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난 쓰러져있는 널 보고 차로 데려왔을 뿐이다.."
형준은 주섬주섬 옷을 껴입는 소녀를 보다 차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보아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피나 닦아라..."
형준은 휴지를 뒤로 건네주었다. 소녀는 휴지를 받아 머리의 피를 닦아냈지만 크게 다쳤는지 아직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형준은 저 소녀를 경찰서로 데려가야 하는지 아니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지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피가 계속 나오는 것을 보고 병원을 데려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머리가 몇센티 찢어진 것과 몇 군데 타박상이 있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상처가 눈에 띠지는 않는군요...물론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라면 좀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 하지만요..."
시내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소녀를 데리고 온 형준은 의사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접수처로 가서 돈을 지불하고 병원을 나와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이상 자신이 그 다 큰 여자인지 소녀인지 모를 사람에게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알아서 하겠지......참, 아직 저녁을 안 먹었군..'
산길을 헤메느라 저녁을 먹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근처에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식당을 찾아 식사를 하러 갔다.
'피곤한 하루였어...'
저녁을 먹고 온 형준은 차를 자신의 집쪽으로 몰아 갔다.
"이봐 여기서 뭐하는 거야!"
신경질이 섞인 어조로 뒷자석에 누워있는 소녀를 보며 외쳤다. 소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언제 탄거야.."
형준은 짜증이나 미칠 지경이었다. 만약 집으로 오는 중간이나 아까 처음에 발견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내려놓고 왔을 것이다. 밤중이라 뒷자리가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가 준 운동복과 차의 씨트가 같은 색이었기 때문에 누워있는 그녀를 못본 이유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그의 성격이 원래 자질구레한 것은 그냥 넘기는 성미였고 또한 차에 누가 타고 있으리라고는 그로서는 전혀 생각치 못한 일이었다.
'제기랄...차 문을 잠궈 뒀어야 했는데...'
저녁을 먹으러 가느라 열었던 차 문을 잠그지 않고 그냥 간 것이 말썽이었다. 소녀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가만히 차에 앉아 힐끔거리며 형준을 쳐다보았다.
"어서 안내릴거냐?"
형준의 외침에 비비적거리고 있던 소녀는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형준은 차 문을 잠그고는 소녀에게 말했다.
"네가 이차에 왜 타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어서 내려서 너의 집으로 가라 저쪽에 택시 타는 곳이 있다..."
그러고는 소녀를 상관하지 않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따라오는 거냐? 병원비까지 대 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야?"
그의 뒤를 계속 쫓아오고 있는 소녀를 쳐다보며 짜증스럽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을 한 뒤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가 잽싸게 문을 닫아 걸었다. 소녀는 깜짝 놀라 쫓아 갔지만 한발 늦어 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를 수 밖에는 없었다.
'제풀에 지치겠지....'
계속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며 형준은 이불을 피고 잠을 잘 준비를 했다. 잠시 후 밖이 조용해지자 이불을 끓어 당기고 잠을 청하려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로서는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 한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신경질이 나고 짜증이 섞인 소리들이었지만...십여년전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처음 이었다. 그는 항상 꼭 필요한 소리 이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별히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들과 있으면 짜증이 나고 조바심이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예 말을 안하고...아니 별로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 갔겠지...'
문득 아까의 그 소녀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본지도 꽤 오래 되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형준은 일어서서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아얏!"
'쿵'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 문 앞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던 소녀는 문이 열리며 몸이 쓰러져 머리를 땅에 박고는 아픈지 머리를 손으로 계속 비비고 있었다.
"아니...휴..너두..참..."
형준은 소녀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 뒤 뒤따라 들어오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다 찢어진 옷 위로 헐렁한 운동복을 걸치고 얼굴은 피와 흙이 범벅이 되서 꾀재재한 것이 완전히 거지같았다.
"저쪽에 가서 좀 씻어라.."
형준이 화장실을 가르키자 소녀는 빼꼼이 한번 쳐다본 후 고개를 수그리고 말했다.
"배..배 고파요..."
"알았으니 어서 씻기나 해..."
형준은 화장실의 세면대에서 물을 트는 소리를 들으며 라면을 끊일 준비를 하였다. 쌀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의 경우 아침은 굶고 점심과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밥을 해 먹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다 씻었어요.."
물만 얼굴에 찍어 바르고 나온 소녀를 보며 형준은 웃음이 나왔지만 마치 해서는 안될 일을 한 사람처럼 금방 얼굴을 굳히고는 말했다.
"그렇게 씻으면 어떻게 하냐...따라와라.."
소녀를 끌고 다시 세면대로 가서 직접 손과 얼굴을 씻겨 주었다. 머리의 상처쪽에 물이 안닿도록 조심해서 씻었다. 그리고는 구급상자를 가지고와 머리 상처에 붙여놓은 거어즈를 갈아주고 팅팅 불어터진 라면을 먹게 해 주었다.
"하나만 더 끊여 주세요..."
소녀는 불어터진 라면을 허겁지겁 걸신 들린 듯 먹고는 숟가락을 빨며 한 그릇 더를 요청하자 형준은 약간 놀란 듯이 그녀를 쳐다보고는 식탁에서 일어서서 가스랜지에 불을 켜고 물을 올려놓았다.
"집이 어디니.."
"....."
"그럼 왜 거기서 쓰러져 있었니..?"
"....."
"무슨 사고를 당한 거니?"
"....."
"이름은 뭐니?"
형준으로서는 이렇게 많은 것을 물어본 것도 처음이고 그 수많은 질문 중에 단 한가지도 대답을 못 들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신경질이나 소리치듯 말했다.
"도대체 집이 어디냐니까?"
"모...몰라요..아무 것도...기억이 하나도 않나요....이름이 뭔지...집이 어딘지...왜 쓰러져 있었는지...."
소녀의 얘기를 다 듣고 형준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너..정말이냐...괜히 수작 부리려는건 아니냐? "
"정말이에요...병원에서 나와보니 아저씨가 보이지 않고...괜히 무섭고... 그래서 차에서 기다리다.."
"그만...거기까지는 얘기할 필요 없고..도대체 왜 나를 쫓아온 거냐..?"
" 저..아는 사람도 없고...아저씨밖에는..."
소녀의 말에 형준은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 판단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혹 붙었군...'
"저....라면은.."
소녀의 소리를 듣고 형준은 그제야 라면 생각이나 얼른 가스 불을 끄고 라면을 가져 왔지만 이미 아까와 마찬가지로 퉁퉁 불어 우동처럼 변해 있었다.소녀와 그는 라면을 보고 웃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웃어보는 것이었다.
"아야야..."
라면을 너무 급히 먹은 소녀는 배를 움켜잡고 바둥거렸다. 그녀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난 이틀간 음식이라고는 입에도 대어 보지 못했던 상태에서 급하게 먹었으니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형준은 배가 아파 바둥거리는 소녀에게 가려다 잠깐 멈칫했으나 곧 결심을 한 듯이 다가가 배를 쓰다듬어주었다. 마음속에서는 이 소녀와 친해지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몸은 그러한 말을 무시하고 행동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들려오던 친해져서는 안된다...조용히 혼자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무시한 행동이었다.
"이제 시원해졌어요...그런데..너무 졸려요..."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형준은 베란다 쪽의 서재와 창고겸용으로 사용하는 방을 치우고 이불을 펴주었다.
"여기서 자거라...."
"....."
소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표정이었지만 곧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고 형준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푹신'
형준은 잠결에 몸을 옆으로 틀자 무언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드는 물체에 몸이 부딛혔다.
"으응.."
답답하다는 듯한 신음을 내뱉는 그 무엇에 깜짝 놀라 정신이 든 형준은 자신의 몸에 달라붙듯 누워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참나....이봐! 일어나봐.."
형준의 흔드는 손길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은 소녀는 왜 형준이 화가 난 얼굴로 달게 자고 있는 자신을 깨우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이 바라보았다.
"여기서 자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저 방에 이불 깔아 줬잖아..."
"혼자있으면 무서워요...."
형준은 소녀의 손을 끌고 그녀의 방에 다시 데려다 놓았다.
"여기서 자는 거야...저 방에는 들어오지 말고..."
다시 잠자리에든 형준은 한 시간쯤 지난 후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악!"
"무슨일이야?"
비명소리에 놀라 소녀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온 형준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 매달려서는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어떤 사람들이...나를...가두어 뒀었어요...너무 무서워요.."
"자,자..괜찮아...괜찮아...악몽을 꾸었나 보구나.."
형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진정 시켰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방으로 데려가 잠자리 옆에 이불을 깔고 눕혀 잠을 자게 해주었다. 잠시 후 소녀의 작고 보드라운 손이 그의 왼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엇..."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형준은 자신의 품에 안겨서 잠이 들어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놀랐지만 곧 잠자는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다 머리를 쓸어주었다.
'귀엽구나...'
자신의 품속으로 더 파고드는 그녀의 몸을 살그머니 밀어내고 부엌으로 가 아침준비를 하였다. 그로서는 단 하루밤새 자신이 어떻게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자신이 달라졌다는건 느낄 수 있었다.
2.
아침에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던 형준은 어제 밤 늦게까지 그 소녀 때문에 부산을 떠느라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쯤이나 되어서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온몸이 날아갈 듯 한 것이 아주 푹 쉬었을 때의 기분이었다.
"아저씨...모..하세요.."
소녀가 어느새 일어나서 눈꼽을 떼며 더듬더듬 형준에게 물었다. 형준은 말을 하지 않고 기차소리를 내고 있는 압력밥솥을 가르켰다.
"넌 어서 가서 씻거라..."
형준이 소녀에게 세수할 것을 원하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화장실에 있는 세면대로 갔다.
'옷을 한 벌 사줘야겠군...'
형준의 눈에 비친 소녀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머리는 헝클어 질대로 헝클어져 있고 잠옷은 그가 예전에 입던 것을 한 벌 준 것으로 손과 발에서 한자 씩 내려오는 커다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꼭 푸대자루를 씌워 놓은 것 같았다.오늘 병원으로 데려가려면 입을 옷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너..이름을 기억 못한다고 그랬지....뭐라고 부를 이름을 하나..."
형준은 아침을 먹다 문득 소녀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잠시 동안이라도 쓸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이봐, 저봐, 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데....'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생각하다 자신도 모르게 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지예, 어떠냐..."
형준은 자신이 그 이름을 말하고는 잠시동안 얼굴이 굳어 졌었으나 소녀가 지어준 이름이 좋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자 부드럽게 볼을 쓸어주며 말했다.
"그래...지예라는 이름이 좋겠구나... 우리 지예와 웃는 모습도 닮았고..."
소녀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이름이 생기자 형준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형준은 얼굴이 어두운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럼 집에서 나가지 말고 조용히 있거라..이따 점심때 와서 병원에 데려갈테니...지..지예야.."
약간 말을 더듬으며 소녀의 이름을 말하고는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예라....'
형준은 밖으로 나와 지예라는 이름을 생각하며 회상에 잠겼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 나가도 별로 친한 친구도 없는 외톨박이였다. 그러나 그는 외롭다거나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다. 지예가 있었기 때문에....지예는 그보다 3살이 어린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으로 항상 자신의 오빠를 기쁘게 해주는 아이였다. 학교가 끝나면 항상 집으로 달려와 동생과 얘기 나누고 놀아주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기뻤다. 동생인 지예 또한 그가 하는 말이면 어떤 얘기든 재미있게 들어주었고 그에게 항상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형준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날 집에 와보니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시간이 훨씬 지났건만 지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온 동생의 소식은 그의 마음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지예가 학교에서 돌아오던 중 도로에서 빨간색 포니로 보이는 자동차에 치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차는 사고를 낸 뒤 곧바로 도망을 가 범인을 아직 못잡았다는 얘기를 듣고 형준의 아버지는 경찰서로 가서 왜 뺑소니 차를 못잡느냐고 따져 보았지만 뺑소니친 차량의 범인은 잡을 수 가 없었다. 형준은 장례식이 치뤄지는 동안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사흘을 보냈다. 몇 달 후 범인을 잡겠다고 생업도 포기하고밖에 나가 빨간색 포니들만 뒷쫓으시던 아버지께서 시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사인은 동사로 술을 너무 많이 드신 상태에서 주무시다 어느 아파트의 주차장에 쓰러져 있는 것을 경비가 발견한 것이었다. 졸지에 딸과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아무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다 일년을 못넘기고 돌아가셨다. 그러나 형준은 더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얼이 빠져있는 상태라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슬퍼하지 않고 아주 담담했다. 이미 자기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지예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깨닫고 있었기에.....
'부질없는 생각이야...'
형준은 동생 지예의 웃는 미소와 그 소녀의 웃는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다 머리를 흔들고는 회사로 차를 몰았다.
미연은 형준과 같은 회사를 다닌지 3년이 넘었지만 그가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항상 무감각한 모습과 그녀가 계속 말을 걸어도 약간 짜증스러운 기색을 하며 꼭 필요한 소리 이외에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온 것부터가 틀리더니 드디어는 약간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이다.형준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는 회사 생활 3년동안 처음있는 일이었다.
"저..송미연씨...잠깐 물어볼 말이..."
"예?...말씀하세요..."
"호..혹시..옷 치수가 어떻게 되는지..."
미연은 형준이 농담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옷을 선물하려고 하는 건줄 알고 얼굴이 붉어지며 마음속으로 기쁨이 솟아 올랐다. 그녀는 전부터 이 무뚝뚝하고 티끌만치의 정도 보이지 않는 김형준이라는 이남자가 무뚝뚝하고 무감각하게 굴면 그럴수록 점점 더 마음속에 각인이 되고 있던 것이다. 자신에게 옷을 선물하고 그동안 불성실히 대해 온 것을 사과하려는줄 알고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러나 주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요..저한테 옷이라도 선물 하실려구요...?"
"그게 아니구요...어떤 여자에를 데리고 있는데 그 애 옷이 없어서요.. 미연씨보다 한 두 치수 정도 작은 것을 사면 될 것같은데..."
그러나 형준은 미연에게 대답을 들을 수 가 없었다. 단지 아까의 붉게 상기된 얼굴과 친근한 정이 담긴 눈빛이 분노해서 쏘아보는 눈초리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뀌었다는 것밖에는 볼 수 없었다.
"농담이 심하시군요..김형준씨"
앙칼진 목소리로 한마디한 후 미연은 주먹을 꼭 쥐고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농담으로 한 소리가 아닌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는 그를 보고 사무실의 동료들은 폭소를 터트리며 배꼽을 잡고 웃어제꼈다.
"하하하..이봐 뭐해 어서가서 우리 사무실의 홍일점을 토닥여 주지 않고"
한 동료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앉아 있기가 거북해 밖으로 나갔다. 미연은 형준이 나오는 것을 보자 재빨리 눈을 비비고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옷 치수를 물어본 것 가지고 왜 그러지...'
그도 슬슬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무실로 들어갔으나 서로 아무 말없이 각자 할 일만을 했다. 주위의 동료들은 낮게 웃으며 이러다 사랑싸움에 고래등 터지겠다는 등의 소리가 나왔지만 형준은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아무소리없이 앉아 자신의 일만을 했다.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 중 송미연이 누구를 쫓아다닌다는 소문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형준은 원래 다른 사람들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송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물론 전부터 이유없이 친절하게 대하고 계속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면서 그의 관심을 끌려고 하였지만 형준에게는 짜증나고 귀찮은 일이었을 뿐이다.
"저.....한..요만 한데요.."
형준은 식은 땀을 흘리며 점원에게 속옷의 싸이즈를 설명했다. 점원으로 있는 여자는 킥킥거리며 무슨 CF찍는 거냐고 묻다 그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는 얼른 그 크기에 속옷들을 골라 포장해 주었다.
'반찬이 하나도 없을턴데...'
형준은 아파트 옆에 있는 상점으로 들어가 몇 가지 물품들을 사서 왼손에 들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이미 지예에게 줄 옷들과 속옷이 들려 있었다.
"딩동" ... "딩동"
벨을 계속 눌러 보았으나 지예가 나와 보지를 않자 열쇠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도 들어가 보았으나 지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준은 마음이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얘가 어디로 간거지...'
할 수 없이 사온 찬거리들을 냉장고에 넣고 나가서 찾아 보려 하는데 냉장고 옆 구석에서 지예가 웅크리고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형준은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깨웠다.
"지예야...여기서 자면 안되요..어서 일어나야지..."
"으..응..."
지예는 눈을 겨우 뜨고 일어나 형준을 바라보았다.
"아저씨....저 이상한 꿈을 꿨어요....어제 저녁에 꾼 꿈처럼 어떤 사람들이 저를 잡아 어둡고 침침한 곳에 가두었어요...."
형준은 그녀의 볼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꿈속에서 너무 두려운 나머지 울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아려 왔다.. 지예는 형준의 가슴에 안기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나타나셔서 그 사람들을 물리치고 저를 구해 주셨어요..."
"그래...어떤 일이 있어도...오빠가 지예를 지켜줄께...걱정하지마...."
형준은 그녀를 꼭 껴안으며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새에요..많이 맡아본 것 같은데...무슨..음식 이름 이었는데.."
지예는 목욕을 하다 말고 욕실 문을 빼꼼히 열고는 얼굴을 내밀어 냄새의 근원을 킁킁거리며 찾았다.
"불고기다, 불고기!...넌 어서 목욕이나 해 제대로 않씻고 나오면 국물도 없는 줄 알아"
형준은 후라이팬위의 고기들을 뒤집으면서 지예에게 얘기했다. 그는 새 옷을 입히기 위해 지예에게 목욕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치..다했어요..."
지예는 욕실에서 나와 새로 산 옷을 안방에서 갈아입은 후 형준에게 보여 주었다. 다행이 청바지 차림의 캐쥬얼한 그 옷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아저씨...저 어때요..."
형준은 그 모습을 보자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예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 보인 것이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열 일곱에서 최대한 잡아보아도 열 아홉정도밖에는 안되는 소녀로만 생각했는데 지금 옷을 차려 입고 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스물정도는 되보였다. 원래 작은 몸집에 그의 큰 옷을 입혀 놓았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리게 보였을 것이다. 지예가 형준에게 활짝 핀 미소를 보여주자 그는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예쁘구나....."
"우와! 맛있다...조금만 더요..."
형준은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불고기 반 근을 거의 혼자서 먹고 그것도 모잘라 국물까지 하나 안남기고 밥에 싹싹 비벼 먹더니 드디어는 밥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형준은 지예를 노려보고는 밥통에서 밥을 한 숟가락만 그녀가 내민 밥그릇에 퍼주었다. 지예는 뾰롱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후다닥 먹어 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내 돈으로 내가 사서 내가 직접 요리한 것을 나는 왜 손도 대보지 못했을까..?'
형준은 아직 상당량이 담겨있는 자신의 밥그릇과 텅 비어있는 반찬 그릇들을 젓가락으로 두들겨보다 자신이 대단한 식충을 데리고 온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머리에는 찢어진 상처 이외에 큰 이상이 보이지 않는군요...아마도 기억 상실증이 오는 것은 어떤 다른 심리적인 원인일 것 같습니다만...."
병원에서 나오던 형준은 의사가 한 말을 생각해 보고 옆에 자신의 손을 잡고 따라오고 있는 지예를 바라보자 지예도 그에게 해맑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젠장...천사가 따로 없군...'
형준은 그 미소를 보며 자신이 이 혹덩이를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돌봐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문득 한가지 생각이 난 그는 지예에게 물었다.
"너..부모님이 보고 싶다거나..뭐 그런 생각 안드니..?"
지예는 고개를 도리도리하면서 말했다.
"아저씨가 있는데요 뭐...그리고 병원에는 다신 안갈래요..."
"왜?"
"주사 맞는게 너무 싫어요..."
지예가 얼굴을 찡그리며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준은 지예가 너무 아이처럼 구는 것이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었지만 의사의 말에 의하면 기억이 상실되며 순간적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으니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빠..."
형준은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다 마치 가슴에 철추를 맞은 듯 고개를 뒤로 돌려 보았다. 자신의 동생이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으나 곧 그녀가 아닌 자신이 구해준 그 소녀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저씨보다는 오빠라고 부르는게 좋겠어요...그 쪽이 훨씬.."
"입다물지 못해!"
지예는 온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화를 내는 형준을 보며 처음에는 화가나 볼이 부운 상태로 아무 말 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형준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마땅히 사과할 말이 생각 않나 뒷 자석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지예를 내버려두고 차를 출발 시켰다.
"흑..아저씨...제가 잘못 했어요...이제 아무소리 안할테니 그냥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여기서 쫓겨나면...아무대도 갈 곳이 없어요...흑흑"
집에 도착해서도 형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예는 지래 겁을 먹고 그에게 울면서 애원을 하였다. 형준은 단지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랬을 뿐이었지 지예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생각 못한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예의 턱을 손으로 올리고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오빠가 동생을 내쫓는 집이 있다고 생각해..? 그것도 우리 지예처럼 착하고 예쁜 아이를...."
"으앙!"
지예는 형준의 가슴에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형준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는 자신의 동생이었던 지예의 얘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나하고 이름이 똑같네요...?"
"그래...지예의 이름을 너에게 준거야...아까 네가 나에게 오빠라고 불렀을 때 그 아이 생각이 나서...나도 모르게..."
형준은 동생이 얼마나 자신을 따라 다녔는지...항상 그가 우울할 때마다 어떻게 기쁘게 해주려 했는지..동생의 얘기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 뿌연 것이 끼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훔쳐냈다.
"그 아이의 웃는 모습과 너의 웃는 모습이 아주 비슷하지...그 맑은 미소.."
형준의 말에 지예는 활짝 미소 지어 보이고는 물었다.
"그 언니 어디서 살아요..?"
형준은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볼 뿐이었다. 항상 그래 왔듯이...
3.
미연은 저번 주 토요일 근무시간에 들은 형준의 얘기 때문에 일주일이 넘게 집에 돌아 가서도 밤새도록 잠을 못자고 뒤척이다 끝내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딩동"
미연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일요일 날 오전부터 형준의 집으로 온 것이었다.
"오빠야!"
문이 열리며 앳되 보이는 잠옷차림의 한 아가씨가 현관 문을 열고 얼굴을 보였다.
"저..누구세요...?"
형준이 아닌 것을 확인한 지예의 물음에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미연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김형준씨댁 아니에요?"
"맞는데요...무슨 일이에요..?"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에요...중요한 일 때문에 왔는데..형준씨를 볼 수 없을 까요..?"
"오빠 지금 없어요...잠깐 나갔거든요.."
미연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지예에게 물었다.
"그래요..그럼 아가씨하고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예..? 저하고요...?"
"네..잠시만요..."
미연은 지예의 대답도 듣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지예는 좀 어리둥절했지만 형준의 회사 동료라는 말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지예에요..지예.."
"예...지예씨..그런데 형준씨하고는 어떤 사인가요..?"
미연이 단도직입적으로 형준과 어떤 사이인지를 지예에게 물었다.
"우리 오빠에요.."
지예는 자랑스러운 듯 대답했다. 미연의 얼굴에는 안도감 같은 것이 퍼졌으나 곧 다시 물었다.
"친..동생이세요..?"
지예는 멀뚱거리다 고개를 도리질 쳤다.
"친 동생은 아니지만...그냥 오빠라고 해요..."
미연의 얼굴은 지예의 대답을 들으며 금새 다시 굳어지고 말았다.
"그..그럼 어떻게 되는...사이시죠...친척인가요..?"
"아..아뇨...그냥.."
지예도 점점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중요한 일 때문에 왔다더니 이상하게 자신과 형준의 관계에 대해서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여자 애를 데리고 있다더니..'
지예와 형준이 친인척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안 미연은 다시한번 지예를 쳐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몸집이 작고 앳되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여자 애는커녕 자신과도 세네살 밖에 차이 않나는 스물둘에서 스물세살 정도인 것 같았다. 약간 신경질이 난 상태에서 지예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문득 지금 입고 있는 잠옷을 보았다. 커다란 남자용 잠옷을 몇 차례나 접어 입고 있어서 펑퍼짐했다. 아마도 형준의 잠옷이리라...
'이럴수가...'
미연은 복받혀 오르는 슬픔과 배신감에 몸을 떨며 더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가 없었다.
'어...어떻게....나..나는..어떻게 하라고...'
아파트를 뛰쳐나온 미연은 길을 걸어가며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송미연씨..!"
미연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자 그 가증스러운 인간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왠일이시죠...우리 동네에..?"
웃으며 묻는 형준을 보고 미연은 배신감이 치밀어 올라 한마디 크게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예전 같으면 길거리에서 아무리 아는 사람 아니 아는 사람 할애비를 만났다 해도 먼저 인사를 할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가지 물건들을 양손 가득 들고 웃으며 서있는 그를 보며 아파트에 있던 그 아가씨가 부러웠다. 단 몇일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하다니.. 자신으로서는 몇 년 동안 노력했어도 불가능했던 일을 그 지예라는 아가씨는 아주 쉽게 해낸 것이다.
"많이 변하셨네요..."
"예..?"
"그...아가씨...좋은 사람같네요...잘해..주세요...흑"
미연은 말을 한 뒤 눈물을 감추기 위해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형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미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로 발을 돌렸다.
지예는 아까 형준의 회사동료라는 여자가 갑자기 집을 뛰쳐나간 뒤부터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뭔가 속은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 하여간 석연치가 않았다.
'중요한 일 때문에 왔다더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경질이 났다. 그 불여시같이 생긴 것이 자신에 대해 따지듯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 하며 직감적으로 형준의 애인이던가 뭐 그런 사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확.....결혼할 사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지예는 질투심이 충천해 작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형준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주고 있나를 생각해 보았다.
'날..그...죽었다는 여동생으로 생각하나봐....'
지예는 맥이 탁 풀렸다. 아무래도 형준이 그녀를 죽은 동생 대용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자 이유없이 슬퍼졌다.
"딩동"
"딩동,딩동"
형준은 아무리 벨을 눌러도 지예가 안나오는 것을 보고 문을 열어보았더니 지예가 무슨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식탁의자에 앉아 있었다. 형준에게는 그 모습이 너무 서글프게 보였다.
'불쌍한 녀석...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저러는구나...'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한 형준은 한아름이나 되는 물품들을 그녀의 옆에 있는 냉장고에 넣었다. 지예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형준을 쳐다보았는데 화가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우리 지예 잠옷하고 새 옷 한 벌이다..."
형준은 시장에서 사온 옷들을 지예에게 꺼네주었다.
"흥, 않입어요...그리고 누가 우리 지예에요.."
지예는 형준이 또 동생한테 애기하는 것처럼 말하자 팩 토라져서 한 마디한 후 건네주는 옷들을 밀어냈다. 형준은 몇 일전이라면 '그래? 그럼 입지 말거라'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틀렸다. 지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어서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녀를 데리고 소풍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지예야...날씨도 맑은대 오늘 우리 유원지로 놀러갈래..?"
지예는 아직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유원지에 놀러 가자는 말을 듣자 혹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요일이라 가족과 나온 사람들이 가득 했다. 형준은 그 많은 사람들을 보자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옆에서 기뻐 여기저기 쳐다보며 재잘거리고 있는 지예를 위해 참기로 했다. 지예는 그가 새로 사다 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머, 오빠 저거 재미있겠다..!"
형준은 지예가 가르키는 방향에 바이킹을 타는 곳이 있는 걸 발견하고 지예와 함께 다른 수많은 사람이 줄 서있는 곳으로 갔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 쌓인 곳에 있어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자동차를 산 이유도 항상 사람들이 북적대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 싫어서 였다. 그러나 오늘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참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점차 시간이 지나자 지예와 함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줄기게 되었다.
"지예야 배고프지..?"
지예는 형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굉장히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했다. 그들은 저녁이 될 때까지 유원지에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둘 다 지쳐있었다.
"오늘은 갈비나 한번 뜯어 볼까..?"
지에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형준의 손을 잡고 식당들이 밀집되어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오빠..안먹어..?"
지예는 갈비한대를 뜯고 있다 형준이 아직 고기만 구우며 그녀에게 건네줄 뿐 자신은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먼저 먹어 오빠는 이 고기 다 구으면 먹을 테니..."
갈비집은 가족들과 함께 온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지예는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다 어느 아주머니가 고기를 구워 남편과 아이들에게 주는 것을 보았다. 다른 가족들도 거의 부인이 가족을 위해 고기들을 구워주고 있지 남편이 아내에게 고기를 구워주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싫어...내가 구울꺼야...오빠가 먹고 있으란 말야.."
형준은 지예의 독촉에 못이겨 고기 굽던 일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갈비들을 제대로 뒤집지 못하고 낑낑거리는 지예의 모습에서 웃음과 함께 전에는 한번도 격어 본적이 없는 편안한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오빠...만약..만약말야...내가 기억이 돌아와 오빠와 헤어져서 원래 집으로 돌아가도...나를....날..잊지 않을 거지...?"
형준은 집으로 돌아와 세면을 하다 지예가 심각한 표정으로 욕실 밖에서 그에게 묻자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지예가 어디있든 무엇을하든...내가 꼭 지켜줄께...영원히.."
지예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얘가 어딜갔지..?'
아침에 일어난 형준은 지예가 옆에 없는 걸 보고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졸이며 일어난 형준은 부엌에서 지예의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예야..뭐하는 거냐..?"
"아침을 준비하는거야..오빠는 일어났으면 어서 세수나 해요.."
몇 일전부터 열심히 텔래비젼 드라마를 보아온 지예는 아내가 해야 할 일들을 보고 배웠다. 밥짓고 빨래하고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오면 '피곤 하셨죠..'하며 아양을 떨어야 한다는 것까지...
"자...어서 드세요.."
지예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형준의 식탁 앞에 밥그릇을 올려 놓았다.
"너는 안먹니..?"
"전..아까 밥지을 때 떠먹어서 괜찮아요.."
'밥을 지을 때 떠먹었다고..?'
형준은 지예의 얘기를 듣고 얼른 숟가락으로 밥을 떠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밥이 아닌 죽이었다. 밥을 처음 해보는 지예는 뜸들이는 중간중간 밥솥을 열고 익었나 안 익었나 맛을 본 것이다.
"지예야..이제부터는 밥같은건 내가 할테니 하지..."
형준은 표독스럽게 쏘아보는 지예의 눈빛 때문에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얼른 밥을 먹었다.
'어, 국도 끊였네....어디한번..'
형준은 국그릇에서 국물을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으윽..'
간장이 따로 없었다. 만약 그가 10여년을 넘게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 오지 않았다면 참지 못하고 오만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 아무런 동요됨없이 군대식으로 밥을 국에 쏟은 후 후르륵 마셔버렸다. 뜨거워 입천정이 데는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우선은 이 아침 식사의 고문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였으므로...형준은 식사를 다한 후 재빨리 집을 나섰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지예는 인사를 하며 시간도 이른데 저렇게 빨리 집을 나서는 이유가 뭘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고 보니 밖으로 나가면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네..밥이 약간 질기는 했지만...먹을만은 한데.."
지예는 그 죽같은 밥을 한 숟갈 떠보다 탁탁 털어내고 국을 끊인 솥에서 국물을 한 숟가락을 떠서 먹어보았다.
"으엑!"
지예의 음식 솜씨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음식이 형준의 식탁에 올라왔다. 그러나 지예는 날이 갈수록 마음이 더욱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다른 부인들처럼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존칭해서 불러주고 그런데 아직도 형준은 그녀를 동생처럼 대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여자로 보이지도 않나..?'
이제는 더이상 혼자 잠을 자도 악몽에 시달리거나 무섭지는 않았지만 항상 형준의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그럴 때면 그는 가끔씩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기도 하고 가볍게 안아줄 뿐 그녀를 동생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새댁, 오래간만에 오네..."
"예에..저번에 너무 많이 사다 놓는 바람에요.."
지예가 동네 슈퍼마켓에 들어서자 뚱뚱한 주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이미 지예는 이 동네에 살면서 이웃들과 친해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녀가 형준의 아내인 줄로 알고 있었다. 지예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형준의 아내인 것처럼 행동했고 사람들들 앞에서 그를 얘기할 때는 '오빠' 라는 존칭 대신 '형준씨' 또는 '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형준은 얼마전부터 지예가 좋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니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침에 일어나 그녀를 보지 못하면 너무나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하루종일 그녀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 느낌들이 어떤건지는 잘 몰라도 더이상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이런 기분이 사랑이라는 걸까...?'
형준은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다 고개를 도리질 쳤다. 사랑이라니..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아는 형준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곧 떠나 버릴 것 같은 느낌 때문이겠지...'
그는 항상 지예가 어느날 기억이 돌아와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둘다 불안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어쨋든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 갈수는 없었다. 만약 결혼 이란걸 하게 된다면 설사 기억이 돌아와 자 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가족들만을 만날 뿐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 얘기를 함부로 꺼낼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을 오빠같이 생각하거나 단지 기억이 돌아올 때 까지 보호해 주는 그런 사람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꼴이리라..
거기다 요즘은 그에게 더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뜻인지 직접 식사도 만들고 그의 빨래를 하는 등 처음에는 웃으며 보았지만 날이 갈 수록 더욱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전과 달리 말끝마다 '요'자를 붙이는 등 친숙하지 못한 행동으로 불안한 감정은 배가 되고 있었다. 어쩌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에게 벗어나 혼자 살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 큰여 자가 남자 혼자만 사는 아파트에 함께 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을 리가 없으니...아직은 잠을 잘때 무서움을 타는지 그와 함께 잠을 자고 있었지만 잠결에 그녀가 안겨올 때마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깨어나 이상한 생각을 가지거나 할까봐 꼭 껴안아주고 싶고 머리카락의 냄새를 맞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가볍게 안아주고 머리를 쓸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러한 생각들로 갈팡질팡하던 형준은 드디어 그녀에게 결혼 신청을 할 결심을 굳히고 혹시라도 그녀가 싫어하는 표정이나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즉시 장난으로 해본 소리처럼 꾸며서 그녀와 서먹서먹 해지는 걸 막을 생각이었다.
4.
오늘은 형준이 아주 굳어진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것을 보고 지예는 가슴이 졸여졌다.
'혹시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가슴 졸이며 형준의 행동을 지켜보는 지예에게 그는 아주 심각하고 무언가 결심한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지예야...나하고...결혼..하지 않을래..?"
말주변이 없는 형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고 지예는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멍청히 있다 형준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는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엇, 아무래도 잘못얘기 한것 같은데...'
형준은 지예가 멍하니 있다 눈물을 쏟는 것을 보자 자신이 잘못 얘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속이 아려 왔지만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장난한 것처럼 꾸미려고 말을 건넸다.
"하하...지예야...그냥..장.."
형준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작고 보들보들한 그리고 흘러내린 눈물로 인해 짠맛이 느껴지는 그녀의 입술 때문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바보....오빠는 정말 바보야..."
지예는 긴 입맞춤이 끝나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속삭였다.
형준은 몇칠 후에 할 결혼식 때문에 기분이 들떠 있었다. 물론 둘 다 가족이 없는 지라 자신들끼리만 하는 일종의 서약식 같은 것이었지만 형준으로서는 지예가 영원히 자신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더욱 컸다. 그는 문득 예전에 길거리에서 점을 쳐보았을 때 점쟁이가 한 얘기가 생각 났다.
'자네는 사주에 호랑이가 세 마리나 들어 앉아있어서 중이될 팔자야..'
형준은 점쟁이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웃음 지었다. 자신은 사흘 후에 결혼을 할 것이므로...
"와..! 정말 예쁘다..."
지예는 시내에 형준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나왔다가 상점에 진열되 있는 웨딩드레스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나 자신은 입어보지 못할 것이리라..형준은 원래 부모형제가 없었고 그녀는 기억을 잃어버려서 달리 부를 사람도 없어서 둘은 신부님이나 목사님에게 부탁해 서약식 비슷하게 혼례를 치를 예정이었다. 지예는 자신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하다 주먹을 꼭 움퀴어 지었다.
'나중에..꼭..'
그때였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와 지예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정신이 드세요..?"
중년으로 보이는 여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여..여기가 어디죠.."
세희는 머리가 멍한 것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이 누워 있는 상점의 쇼파를 보며 물었다.
"우리 가게 앞에 아가씨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이리로 데려와 눕힌 거에요.."
주인여자는 자신의 가게 앞에 쓰러져 있는 세희를 가게안으로 데려와 쉬게 해준 것이었다.
'그때...차에서..'
세희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어떤 사람들에게 납치가 되었던 것이다. 이틀인지 사흘인지 모를 시간을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갇혀 무서움에 몸서리 쳤던 기억들..몇 일 동안 그들은 그녀에게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사흘정도가 지나서야 그녀에게 빵 하나와 우유 하나를 주고서는 지하실에서 끌고 나왔다. 그들은 세 명으로 밤중이어서 얼굴은 잘 기억이 안났다. 그러나 그들이 차를 타고 아지트를 옮길 때 앞자리에 탔던 두 사람은 잘 모르지만 뒷자리에 타 자신을 범하려던 그 음흉한 눈초리의 흉칙하게 생긴 남자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발버둥치는 자신을 구타한 뒤 옷을 찢던 그 모습 죽어 시체가 된다 해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승용차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웃고 그 흉칙한 남자가 자신의 팬티를 찢어 버릴 때 온 힘을 다해 차문을 연 것까지는 기억 나지만 그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옷을 살펴 보니 입고 있던 찢어진 옷은 어디로 가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가씨..병원에 안 가봐도 되겠어요..?"
"예?..아니에요.....고맙습니다..그럼.."
세희는 걱정하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고 집으로 향했다.
형준은 걱정이 되었다. 지예가 돌아올 시간이 훨씬 지났것만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와 결혼하기 싫어서였을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더니 돌아오지를 않았다. 형준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예의 옷이나 물품들이 있는 방을 가보았다. 다행히 없어진 물건들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물건들은 전부 자신이 사준 물건들 뿐이었다. 그녀가 떠나자고 했다면 그런 것들을 가지고 갈 리가 없었다. 형준은 밤새도록 현관문 앞에서 지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회사에 나가지 않고 현관문 앞에서 사람들의 오가는 발자국 소리만을 들으며 그녀를 기달렸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지예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때부터 다시 마음속에서 지예를 만난 후 사라졌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보라구...내가 사람들에게 정을 주지 말랬잖아...내 말을 들었어야지 사람들하고는 친해 보았자 상처받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는걸 그렇게 경험하고도 몰라..?'
형준은 다시 마음속의 목소리를 따라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눈앞에 아련히 보이는 지예의 모습 때문에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반대로 혼자있으면 미칠 것같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달리 친구가 없는 그로서는 홀로 버티지 못하고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지예가 없어진지 나흘째..그는 세수를 하러 왔다 세면대위에 붙어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거울 속에는 몇 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해 초취하고 눈이 씨뻘게져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서 분노를 느꼈다.
"바보..결혼하자고만 안했어도..."
모든 것이 자기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형준은 자기자신에게 끊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볼을 힘껏 후려쳤다.
한 대..
두 대..
......
쉬지 않고 계속되는 매질에 입술이 터지고 볼은 붉게 부어 올랐다. 그제야 때리는 것을 그만두고 눈물을 흘리며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경찰에서는 이번 납치사건의 나머지 용의자 두 명에 대해서 전국에 수배령을 내린..."
형준은 벌써 사흘째 미친듯이 지예를 찾아 헤메고 있었기 때문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와 지예가 같이 다니던 곳부터 시작하여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은 전부 뒤지고 다니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고 옷차림도 여기저기 구겨지고 찢어진 것이 말이 아니었다. 오늘도 하루종일 지예를 찾다 저녁이 되어서야 배고품을 느끼고 식당으로 들어선 것이다.
'만나기만 하면... 다시는... 결혼같은 것 하자고 안할텐데...그냥..예전처럼...함께...아니..아니야...얼굴만 다시한번 볼 수 있어도...'
국물을 떠먹는 그의 오른손은 거울을 쳤을 때 다친 상처를 잘 치료하지 않아 여기저기 상처가 덧나고 신경도 다쳤는지 부들거리고 있었다. 빨리 먹은 후 다시 지예를 찾으러 가기 위해 부지런히 밥 숟갈을 떠 넣던 그가 문득 식당의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쳐다보았을 때 그는 텔레비젼 안에서 지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카메라에 잠깐 스쳐갔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 머리모양등으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형준은 주위 사람들에게 지금 앵커가 얘기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려 달라고 물었다.
'난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세희는 지난 반년간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몸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잊어 먹은 듯한 느낌이 들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단지 가족들만이 그녀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을 욕보이려던 그 남자는 처음 그녀를 가두어 두었던 지하실에 기웃거리다 경찰에 잡혀 사건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20억의 몸값을 요구하던 일당 세 명은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그녀를 데리고 다른 아지트로 옮기려다 그녀의 돌발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다시 차를 세운 후 그녀를 찾아보려 했으나 때마침 지나가는 순찰차량때문에 포기하고 그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훗, 내가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렸다니..'
세희는 집으로 돌아온 후 에도 자신이 입고 있는 분홍색 원피스를 벗어 본 적이 없었다. 겨우 잠 잘 때가 되서야 잠옷으로 갈아 입는 정도였다. 집안사람들은 그런 싸구려 헌옷이 뭐가 좋다고 입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 옷을 입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이 어느 정도 그 무엇에 대한 상실감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안 보여준 남자용 손목시계를 항상 손에 쥐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던 곱게 포장된 물건이 있어서 뜯어 보았더니 가짜 금장시계 하나가 나왔던 것이다. 그녀가 형준에게 선물하기 위해 두 달 간의 식료품비를 절약하여 구입한 싸구려지만 그녀의 마음이 담겨있는 물건이었다. 물론 지금의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가슴이 아련할 때 손에 쥐고 있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올라왔다.
'누굴까?'
창밖의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세희는 문득 집밖에 서있는 한 사람을 보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도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형준은 오늘 기분이 좋았다. 근 열흘만에 지예를 아니 이제는 세희가 됐지만 어쨋든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면도도 깨끗이하고 손의 상처도 붕대로 잘 감싼 후 새 옷을 입고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달린지 2시간만에 그 집 2층에서 그를 쳐다보는 세희를 볼 수 있었다. 아직도 그가 예전에 사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너무 멀어 제대로 볼 수 없는게 흠이었지만 그게 차라리 나았다. 자신을 못 알아 볼테니...
세희는 며칠전서부터 이상한 사람이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주시하는 인물을 길을 지나다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상당히 친근감이 가는 인물이었는데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그녀는 경찰서에 신고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을 계속 주시하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항상 멍해있던 자신이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형준은 드디어 오늘 그녀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세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항상 그녀를 따라다녀도 알아보지 못하니 뭐라 그럴 리가 없을거고 알아보고서도 모른 척 했다면 그가 어떻게 하든 더이상 상관치 않겠다는 뜻이니 그 또한 나쁠 것이 없었다. 오늘 그녀의 앞에 서기 전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혹시 자신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요..!'라고 말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조바심을 냈던 것이다.
"몸은 괜찮아..?"
한종민의 말에 세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종민은 그녀의 아버지 민성혁의 친구인 한민기업 회장의 아들로 세희와는 작년에 약혼한 사이로 외국에서 유학 중 세희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오늘 도착해 즉시 세희의 집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납치됐다는 얘기 듣고 걱정 많이 했다..."
종민이 세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하자 세희는 얼른 손을 뽑고 바르게 앉았다. 전에는 그렇게 친했던 같은 대학 선배이자 약혼자인 종민이 오늘은 왠일인지 낮설고 불편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납치사건이후 세희가 계속 멍해 있자 이번에 귀국한 종민과 아예 혼인을 시킨 뒤 함께 외국 유학을 보낼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형준은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들을 듣고 세희가 얼마 후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형준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으나 자신의 집에서 무서움에 떨며 혼자 자지도 못하던 지예일 때를 회상하며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한종민인가 하는 인물은 명문대 출신의 재원으로 집안도 좋고 모든 것을 갖춘 훌륭한 신랑감 같았다. 자신처럼 학력도 없고 재력도 없는 고아보다는 그 쪽이 훨씬 나았다. 형준은 더이상 이렇게 다른 사람들 눈에 띠는 행동을 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자신과 함께 지낸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혼사를 치르는데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물론 자신과 그녀는 어떤 관계도 갖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6개월을 함께 살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걸 믿을 리는 없었다.
세희는 요즘 들어 짜증이 나고 마음이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 지루하고 예의없는 약혼자는 아직도 혼자 외국 풍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간간히 팔장을 끼려 하거나 어깨에 손을 두를려고 할 때마다 징그럽고 소름이 돋아 옆에 있기가 싫었다.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왜 이럴까...그런 생각 때문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어보기도 하고 시계를 꼭 움쿼 쥐고 있어보아도 불안한 마음을 안정 시킬 수 없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항상 자신을 보고 있던 '그'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몇칠 째 먼 발치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근처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건 느낄 수 있었지만 정작 '그'를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시내로 나가보기로 했다.
"쌍년.."
껌을 질겅거리며 씹고 있던 최동호는 세희의 모습이 보이자 강성팔에게 턱짓을 했다. 반년 전에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 이미 박천호는 잡혀간 상태였고 자신들도 수배령이 내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이번 일은 복수와 함께 자신들이 잡혔을 때 중요 증인을 미리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출발해.."
동호의 말에 성팔은 악셀을 힘껏 밟았다.
"끼이이익"
시내로 세희는 뭔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뒷쪽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았지만 몸이 굳어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악!"
세희는 옆으로 넘어지며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밀어내고 대신 차에 퉁겨져 오르는 모습을..차를 타고 있던 동호와 성팔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 때문에 성팔이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옆으로 꺽었기 때문에 담장에 차를 박은 것이다.
"무..무슨일이야..."
"뭐야..?"
"어떻게 된일이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여들었다. 세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구해주고 대신 차에 치인 사람이 누구인지 바라보았다. 바로 며칠전서부터 보이지 않던 '그'였다. '그'는 아직 의식이 남아있는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구나...다치지 않아서...'
형준은 앞이 껌껌해 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아니 지난 세월 동안 이토록 가슴이 시원해 져보기는 처음이었다.
'진작에...이미 10년전에 이랬어야 했는데....'
형준은 요란하게 싸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듣다 의식을 잃었다.
"전 괜찮아요, 같이 가겠어요!"
세희는 그녀를 말리는 가족들을 뿌리치고 형준을 실은 엠브란스 위에 같이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 사람은 왜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구해 주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우연히 지나다 그렇게 된 일일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가 항상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들어선 종민은 세희의 모습을 보자 뒤에서 껴안았다. 그러자 세희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같은 모습으로 그를 홱 밀쳐내고 독살스럽게 쏘아 보았다. 쑥스러워진 종민은 사과의 말을 건냈으나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엑스레이 촬영을 마치고 수술실로 가고 있는 형준을 따라가다 수술실 문 앞에서 저지 당했다.
"저런 사람 처음 봤어요...아무리 혼수상태라지만 저 지경이 된 상태에서도 미소를 짓고 있다니...."
간호원의 말을 들으며 세희는 '그'의 상태를 묻자 자기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갈빗대가 부러져 내장을 찔러서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는 말을 듣고 세희는 멍한 상태로 병원을 나섰다. 종민이 따라 나왔으나 혼자 있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한참 동안을 걸어 갔다.
"어머, 새댁 어디 갔었어 남편이 얼마나 찾으러 다녔는데.."
정신을 차린 세희는 어디서 많이 본 것같은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곧 그 아주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자 문득 자신이 어떤 집 앞에 서있는 것을 알고 자신도 모르게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형준이 혹시라도 지예가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 잠그지 않고 나간 것 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선 세희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기저기 물건들이 헝클어져있고 화장실 쪽은 깨진 유리파편과 피물이 굳어 오통 뻘거죽죽했다.
문득 안방에 들어선 세희는 액자로 되있는 사진을 보고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며 멈추어 섰다. 그 사진에 나온 인물은 '그'와 자신으로 전에 유원지에 놀러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에는 그동안의 일들이 스쳐갔다. 처음에 만난 날 라면을 끊여주던 모습...유원지에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던 기억 잠을 잘 때도 무서워하는 그녀를 꼭 껴안아주던 형준의 모습등.
모든 것이 기억이 나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마지막으로 간호원이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저런 사람 처음 봤어요...아무리 혼수상태라지만 저 지경이 된 상태에서도 미소를 짓고 있다니....'
'갈빗대가 부러져 내장을 찌르고 있어서 상당히 위험한 상태래요...'
"아..안돼!"
세희는 크게 부르짖으며 밖으로 뛰쳐나가 병원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눈물 때문에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가 해준 말은 생생히 귀에서 들려왔다.
'오빠...만약..만약말야...내가 기억이 돌아와 오빠와 헤어져서 원래 집으로 돌아가도...나를....날..잊지 않을 거지..?'
'지예가 어디있든 무엇을 하든...내가 꼭 지켜줄께...영원히..'
잃어버린... 사랑... END
언제 다시 읽어봐도 눈물이...
글쓴 분이 누군지 정말 궁금합니다. 정말 잘 쓴 글인 것 같습니다. 언제고 누군가가 멋진 미니시리즈나 영화로 다시 만들어도 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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