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Crack)

enzoy : 자작이네-_-; : 1998/01/03 04:05
(1994년에 썼던 글. 금은 쇠붙이 금이 아니라 갈라진 틈을 말함.)


이 사실을 안 것도 밖으로 나온 후였지만...

나는 액체 속에 살았었다. 지금도 가끔씩은 나를 감싸 보듬어 주며 내가 최고로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그 액체 속에 있었을 때가 더 나았지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게 좁은 곳이었다. 정말 아주 작았던 나의 몸이 떠다니며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아주 쉽게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공간에 빈틈없이 부드러운 액체가 차 있고 사방은 작은 구멍이 꽤 나 있지만 아주 딱딱하고 두꺼워 바깥이 보이지 않는 벽으로 막힌 그런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생겨났던 나는 처음엔 그곳 이상의 세계를 생각해 내지 못했었다. 그게 당연히 '작은 나'의 '넓은 세상' 전부였고 벽 건너에 무언가 다른 세상이 있을 거란 생각의 개념조차 없었으며 그 벽으로 싸인 공간이 좁다는 생각은 시도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 나의 사고수준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공간이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말도 안 되게 좁았었군'하며 뒤돌아보게 될 줄이야...

처음엔 난 먹을 줄 밖에 몰랐다. 날 둘러 싼 액체에 들어 있는 먹을 것들을 가끔씩 배고플 때 빨아먹고, 뭐든지 해결해 주는 고마운 액체에 나의 배설물을 분출하고, 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떠다니고 하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내 주위의 액체와 벽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눈과 귀가 생긴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소리니 형상이니 하는 개념도 없었다. 그 이후로 귓구멍으로 가끔씩 들려 오는 벽 저편의 소리들을 들으며 벽 건너에 뭔가 다른 세상이란 게 있구나를 아주 조금씩 깨달아 갔다. 고마운 나의 벽은 내가 들어야 될 소리들과 내가 마셔야 할 공기들만을 그의 두터운 망사 같은 몸으로 걸러 나의 액체 속에 녹여 주었다. 난 나의 작은 아가미로 액체 속의 공기를 들여 마시고 내 작은 귀로 그 소리들을 들어 세상을 익히며 그렇게 살아갔다. 그런 삶이 단순하다거나 편하다거나 하는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평온한 나에게 아주 가끔씩 혹독한 시련을 주는 존재가 있었다. 나의 벽이 미처 막아 주지 못한 외부의 병균들은 잊혀질 만하면 다시 찾아와 내 작은 육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래도 한번 겪었던 병균에게 다시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내 몸은 점점 튼튼해지고, 커져 가고, 각 부분의 모습이 나 병아리의 모양으로 잡혀져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벽 너머 소리를 들으며 그곳에는 나와 같은 존재들이 여럿 더 있다는 것과 나보다 훨씬 큰 존재들이 계속 나와 같은 존재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몸뚱이가 나의 공간을 반 이상 채우도록 커졌을 때, 병균이 주는 고통 따위는 시련 축에도 못 낀다는 걸 알려주는 듯한 진짜 시련이 내게 닥쳤다. 내 몸이 이유 없이 아주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그 지끈지끈거리는 고통과 압박감은 몸 속 깊은 곳부터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가장 큰 스트레스는 숨쉬기가 정말 힘든 것, 그것이었다. 가뜩이나 숨이 안 쉬어지는 몸뚱아리인데 눈에 띄게 점점 사라져 가는, 날 지켜 주던 액체와 그 속에 녹아 있는 공기는 더욱 호흡곤란을 부채질했다. 언제라도 내가 숨쉬기를 포기하면 난 죽을 수 있었고 가끔은 심한 고통에 차라리 그러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의지가 약한 나는... 끝내 아주 천천히 숨을 쉬다가는...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몽롱하니 나의 의식이 멀어져 간다.

'벽 너머에 있는 나와 같은 그 존재들도 여기를 이겨내지 못할까? 나만 그런 걸까?'

약간은 놀라며 다시 정신이 들었다. 눈을 깜빡이며 뭔가를 느꼈다. 온 몸이 개운하게 말끔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숨도 약간은 어색하지만 잘 쉬어진다. 앗! 그러고 보니 나는 그냥 공기를 직접 들여 마시고 있다. 나의 아가미가 폐로 바뀌려고 그렇게 몸이 아팠었나보다. 나의 벽이 걸러 주는 공기를 직접 마시며 조금씩 폐호흡에 익숙해져 가며 자라난 나는 이제는 나의 공간을 꽤 채우도록 커져 버렸다. 액체는 어느 새 거의 없어져 버렸다. 내가 벽 건너로 느낀 것들 중 작은 체구에 삐약삐약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존재들은 나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이 이때쯤이었다. 허나 이상한 것은 그들은 나 같이 벽으로 싸여 있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나와 같이 벽으로 싸여 있는 존재도 많은 듯했다. 생겨날 때부터 틀린 것일까? 벽의 바깥에서 생겨났는가 벽의 안에서 생겨났는가의 차이일까? 아무튼 난 그들이 부러웠다. 벽 없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그들이...

어느 날 깨달았다. 난 나의 벽을 깨고 밖으로 나가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걸. 하지만 아직 이르다. 나의 몸은 아직 다 여물지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난 내 몸이 빨리 완벽히 다 자라나 벽을 깨고 나갈 수 있는 그날만을 기다리며 살게 되었다. 바깥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 소리들의 정체는 어떤 모습일까? 그 바깥에 더더 큰 벽이 또 있을까? 얼마나 큰 공간이 있을까?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그 느낌은 얼마나 시원할까? 어떤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될까? 혹시 또 다시 액체 세상이어서 나의 폐를 다시 아가미로 바꾸어야 하는 고통이 있지나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싸여 점점 구석구석 갖추어져 가는 내 몸뚱아리 자체가 희열이었다. 그리곤 나의 몸으로 꽈악 차 버린 나의 공간이 유독 좁게 느껴지던 어느 날... 이제는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읍∼!

깊게 숨을 한번 들여 마신 난 목에 힘을 주어 부리로 벽을 쪼았다. 벽은 그리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몇 번의 반복 후에 벽에 찌익 찌익 이 갔다. 바로 이 과 함께 뇌리에 이상한 느낌이 스쳤다. 갈라진 을 통해 바깥의 아주 강렬한 빛이 얇게 쏟아져 들어오고 전혀 안 걸러진 공기가 폴폴 새어들어 왔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이것들에 대해 내가 느낀 감정이 '무서움'이었다니. 정말로 이상했다. 난 내가 그렇게도 고대해 오던 것을 드디어 접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무섭기만 하다니. 엄청난 공포에 휩싸여 어떤 희열도 기대도 생각할 수 없었다. 빛이 조금씩 넓어지는 듯하더니 벽이 약간 떨어져 나가 아주 굵은 빛기둥이 내 얼굴을 강타했을 때 난 눈을 찔끔 감으며 온몸을 꽈악 움츠렸다. 더 이상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 왜일까? 내가 방금 전에 쪼았던 그 벽을 더 이상 쪼고 싶지 않았다. 난 이 속에서 계속 아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여기가 따뜻하고 아늑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저 바깥이 더 좋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나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자라 오고, 아가미를 폐로 바꾸고, 또 자라 온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무섭다. 생각해 보니 날 둘러싼 이 벽은 바로 나 자신의 몸뚱이 일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껍질인 것이다. 내가 내 부리로 내 배를 쪼아 가를 수 없듯이 난 나의 껍질을 부술 수 없다. 근데 말도 안된다. 나는 분명히 나가야 한다. 자라 버린 나의 몸 크기를 생각해 보아도 나는 안 나갈 수 없다. 게다가 이미 이 안에는 액체와 함께 모든 먹을 것은 떨어져 버렸다. 난 나가야 한다. 당연한 것이다. 나를 가두는 나의 벽을 벗어나 이제 모든 것을 본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곧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난 선뜻 해낼 수가 없었다...

틱틱... 뽀각 뽀각...

뭘까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 사이 더 커진 벽의 금과 구멍으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 난 단번에 그게 누구인지 알아 챌 수 있었다. 항상 껍질 밖에서 내가 따뜻할 수 있도록 감싸주던 나의 그 크나큰 존재... 그 분이 그의 큰 부리로 나의 껍질 깨는 것을 도와주고 계신 것이었다. 난 그제서야 겨우 다시 나의 껍질을 깨기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곤 노오란 병아리의 존재로서, 끝이 보이지 않게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난 나보다 일찍 나온, 또 늦게 나온 나와 닮은 존재들과 어울리며 잘 커 가고 있다. 알 속의 이런 저런 시련을 끝내 못 이겨내어 영원히 알에서 못 나온 자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나 자신과 우리들 모두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 노란 병아리의 시절도 지나갔다. 병아리도 아니고 닭도 아닌 어중간한 지금의 내가 우습게도 비치지만 언젠가 닭이 되어 큰소리로 홰를 칠 나를 생각하며 열심히 커 갈 뿐이다.

Trackback Address :: http://blog.enzoy.pe.kr/trackback/635


    Comment(s) :

Write a comment


<< : [1] : .. [672] : [673] : [674] : [675] : [676] : [677] : [678] : [679] : [680] : .. [694] : >>

광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