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구석
enzoy : 자작이네-_-; : 1998/01/01 04:05♪비가 내릴 듯 저즈은 바람 불어 오면...♩♬
10년 낯익은 동네 길... 싸늘한 날씨였다. 귀에 꽂은 워크맨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에 부웅 떠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 노래는 가사 때문에 잡다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정말 비가 내릴 듯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며 나도 살짝 찌푸렸다.
'에이∼ 오락실이나 가려고 했는데...우산이 없으니 집에 가야겠군...'
저벅저벅...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워크맨을 꺼내어 듣던 테잎을 책상 위 더블데크에 넣고 Play 버튼을 누르곤 바닥에 외투를 벗어서 버렸다. (엄마 표현으론 "뱀 껍질처럼") 노래 속에 잠시 빈둥빈둥 누워 있는 나... 난 저런 침울한 노래를 좋아한다.
♩♩♩♩♪♪♪♪♪♪♪♪♩♩♩♩
잠시 흐르는 정적을 틈타 커지는 빗소리를 오토리버스 소리가 잠깐 가르고, 곧 다시 노래가 흘렀다. 창 밖에 서러워 우는 듯 나직히 비가 내린다. 어두침침한, 이불도 안 갠 내방에 이러고 누워 있자니 참 한심하다. 뭐 할 일이 없을까? 버릇에 없는 공부를 하긴 싫고, 비가 오니 친구들 불러내 놀 수도 없고, 방 청소도 어제 했고... 책장은 아직 정리 할 필요가 없고... TV도 볼거 없을 테고... 뭘 할까나... 잠시 생각한 후 결정을 내렸다.
'책상 서랍을 정리해야지!'
일어나서 책상서랍을 열어 봤다. 알고 있던대로 정말 엉망이었다. 그 상태는 안 쪽으로 갈수록 점점 심해지다가 급기야 끝부분에서는 뭔가가 걸려 더 이상 서랍이 열리지를 않는다.
"익! 익! 이게 왜 열리질 않아!"
온 힘을 줘서 다시 한번 당기자마자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우당탕 튕겨져 나온 서랍은 나를 넘어뜨리고 이불 위에 온갖 내용물을 쏟아 부으며 엎어졌다. 뭔가 안되는 날이다. 유난히도 물건들이 몸에 꼬이는 날이 있다.
"에에잇!!!"
하루종일 찌부둥하게 쌓여 오던 짜증이 폭발했다. 탈탈 털고 발딱 일어나 서랍을 냅다 걷어차려다가 멈칫하고 관두었다. 분명히 서랍을 걷어차면 몸에 뭔가 또 꼬여 더 사나운 꼴을 연출할 것 같았다. 끓어오르는 분통을 갈비뼈로 꾸욱 누르고선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을 확 열어 제꼈다. 아악! ... 창틈에 손가락을 찌었다.
'제길...'
손목을 탈탈 털며 창밖을 바라본다. 이제는 춥다. 어느 새 비는 장대비였다. 억샌 빗줄기들이 내 방 창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네를 말끔히 씻어 내리고 있다. 젖은 참새와 자기 부근으로 빗방울들을 뿌옇게 퍼트리며 파르르르 떨고 있는 나무들과 지붕들, 떨어지는 잎새들. 그치고 나면 분명히 하늘이 깨끗하게 개이고 멀리 있던 산이 성큼 가까이 다가와 앉을 것만 같은 그런 가을 장대비였다.
쏴아아아아∼∼∼
.................................
핫! 어느 순간 발이 젖은 느낌에 퍼쩍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몽롱하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버렸네. 바람타고 들이친 비에 바지가 좀 젖어 있었다. 비는 방바닥에까지 들이쳐 있었다. 양말로 그냥 스윽 닦아 무시하기엔 좀 많은 양이었다. 방안에 휴지도 없군. 부엌에서 걸레를 갖고 와 바닥을 닦고 나니 뚜웅한 내방의 공간이 다시 나를 감싸온다. 이불을 바라보았다. 쏟아진 잡동사니들 사이로 뭔가가 눈에 띈다. 옅은 갈색 봉투가... 앗! 저건... 얼른 봉투를 스윽 빼내어 보았다.
'맞아... 졸업을 한지 벌써 반년이 훨 넘게 지났구나! 이 녀석을 못 본지도 벌써...'
맞다. 동네에서 먼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새 환경, 새 생활과 새 친구들에 둘러 싸여 너무 정신없이 살았다. 벌써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이다. 중학교 때 정말 친하게 지냈고, 또한 라이벌이기도 했던 이 녀석을 까맣게까지 잊고 있었다. 녀석과 나는 집도 먼데 자주 놀러 다니며 정말 친했었는데... 하지만 고등학교가 다르게 배정됐고...
아뭏튼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 갈색 봉투는 2년전 2학년 같은 반일 때 주고 받은 것. 맨날 얼굴 맞대고 있는 사이에 새삼스런 편지라는 게 참 묘한 전달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걸 느끼게 해 준 편지다.
갑자기 난 신이 나기 시작했다. 거의 9개월... 아직은 어색하지는 않다. 마침 저번 스승의 날에 중학교 때 은사님 국어 선생님께 쓰려고 샀다가 못 쓰고 말았던 연두색 편지지와 봉투도 이불 위에 엎어져 있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난 엎어진 서랍은 엎어져 있으라고 제껴두고 의자를 일으켜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더블데크에선 여전히 그 테잎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래∼ 멀리 떠나자. 그리움을 만나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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