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름돈, 차비.. 미장원.

enzoy : 쇠털나날/쇠털날 - 일상다반사 : 1998/09/23 04:21

머리를 짧게 깎은 후로는... 난 머리에 전혀 신경을 안쓰고 있다.
원래 심한 개털곱슬에다가 숱이 참 많은 편이다. 한때는 스트레이트 파마를 열심히 했었다.

오늘은 잠에서 깨어 어쩌다 거울을 보니 내꼴이 조금은 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옆하고 뒤쪽 가생이라도 깔끔하게 밀어야 쓰것다 싶어서 미장원엘 갔다. 전에 갔었던 미장원에 가려고 했는데 가보니 셔터가 내려있고 며칠간 하계휴가를 떠났다고 써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 옆에 다른 곳엘 갔다.

의자에 앉아 미용사 아가씨하고 어떻게 깎아달라는 등 마지막으로 언제 깎았다는 둥 원래 곱슬이 심하냐는 둥 숱이 많다는 둥둥... 얘기를 하고 막 머리를 깎기 시작할 때 미용사가 이렇게 말했다.

"저 기억하세요?"

옆자리의 헤어드라이기 소리 등등 심한 소음속에서 난 잠시 내가 문장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모르겠어서 거울로 힐끔 미용사를 바라보았다. 미용사가 갑자기 그런 뚱딴지 없는 얘기를 할리 없지 않는가? 그리고, 물론 난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최근에야 꾸준히 다닌 미용실도 없긴 하지만, 이 미장원은 처음인데다가... 미용사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고 있어도 떠오르는 바가 전혀 없었다.

뭐라고 해야하는건지... 내가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뚱딴지가 될지도 모르는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빤히 바라보다가 뭐라고 그랬냐고 물으려는 찰라에 그녀가 말했다.

"못알아보시네요."

그러더니 말없이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뭐가뭔지 모르겠다. 난 그냥 생까고 앉아 있었다.

한참을 머리깎다가.. 그녀는 또 이렇게 물어본다.

"모자 자주 쓰고 다니세요?"

"아..? 모자요? 네. 거의 항상 쓰고 다녀요."

미간이 약간. 겨우 알아챌 정도 찌그러진다. 그 사람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것같았다. 마치 모자쓰고 다니는 사람들의 머리는 상당히 다루기 싫다는 듯한 분위기를 물씬 풍겨온다..

약간 뜸을 들이다가 나는 이렇게 물어봤다.

"모자 쓰고 다니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뭐가 좀 다른가요?"

그러나 그녀. 내말을 그냥 생까버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러더니 대답은 않고 불쑥 한마디를 또 내게 묻는다.

"혹시... 전에 머리 길게 기르신 적이 있었나봐요?"

"(오잉??) 네에..? 네. 기른적 있었어요. 어떻게 아셨죠?"

"모자에 머리를 길렀던 흔적이 남아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모자에 내가 한때 머리를 길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라? 말도 안된다. 긴 머리카락이 모자에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저 모자를 몇번을 세탁했는데... 난 내 길었던 말총머리를 자른지 서너달이 되어가는데 말이다.

궁금해서 물어봤다.

"머리를 길렀던 흔적이 어떻게 모자에 남죠?"

"...."

우어어~~ 이 여자.. 또 생깐다. 대답이 없다. 하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엔 다시 캐물어보았다.

"궁금해요 가르쳐주세요. 어떻게 흔적이 남는지."

그래도 대답을 안한다. 아까부터 계속 묻어 나오는 무거운 분위기에 나도 이젠 감정의 중립을 유지하기가 좀 힘들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머리가 빨리 자라는 편이세요?"

머리를 다 깎고 머리를 감기며 다시 그녀가 물었다. 난 머리가 길 때는 약간 머리가 빨리 자라던 편이었던 것 같은데 자르고 난 후 지금은 정말로 더디게 자란다.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웃지만, 머리카락의 무게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머리가 길 때 무거운 머리의 무게 중력이 모근을 땡겨줘 머리가 빨리 자라게 도움주던 것이 사라져서 더디게 자란다는 지론이다. 난 실제로 그렇다고 느끼고 있다.
야한 생각을 많이 하면 머리가 빨리 자란다는 말이 있다. 난 머리 자라는 속도에 관한 화제로 말을 할 때마다 야한 생각에 대한 농담 거리를 곧잘 지껄이곤 한다.

하지만 아뭏튼, 난 그녀에게 대답을 안했다. 아무 표정도 안바꾸고 생깠다.

"수고하셨습니다."

머리를 다 깜고, 말리고는 일어나 계산을 했다. 만원을 내며...

"얼마죠?"

"6500원입니다. 원래 8000원인데 지금 개점 1주년 기념이라 DC하고 있어요. 회원카드 있으세요?"

"아뇨 없어요."

"하나 만드세요. 자 여기에 이름하고..."

"아뇨. 괜찮습니다."

"부담스러울만한게 없는데.. 하나 만드시..."

"다시 올일 없을거에요. ^^"

난 미소띈 표정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뱉었고, 미용사는 정말 대단한 무표정으로 잠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더니, 아주 느린동작으로 내게 5000원을 거슬러준다. 거스름 돈을 주머니에 넣고 문쪽을 향하려다가 뭔가 계산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거스름돈에 뭔가 500원스러운 것이 있어야 할 것같은데 없어서 생각해보니 거스름돈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돌아서며 그녀에게 다시 말을 하려는데 미용사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검지를 세워 입술에 곧게 가져다 대고 있었다. "쉿" 이라고 말하는 듯...

그리곤 점장 아줌마 쪽을 힐끗 곁눈질로 가르키곤 다시 날본다.
그러더니 두손바닥을 기도하듯 붙이더니 문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_-;;; 도무지 무슨뜻인지?
암튼, 제발 부탁이니 정잠 눈치 안보이게 조용히 그냥 나가달라는 듯했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거스름돈을 천오백원 더 받은 상태에서. "뭔가 사연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오다가 오락실에 들러 오락을 하던 중 그녀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그래. 그거였다.

"저기, 정말로 죄송한데요.. 정말.. 죄송해요. 500원만 주시겠어요?"

밤 11시 40분. 퇴근하는 길. 전철 노량진역에 내려서 버스정류장에서 정말 곤혹스런 표정으로 망설이며 두리번대다가 그 여자가 나한테 다가와 던진 말이었다.

"(난 꽤 당황했다.)5... 500원이요?"

"네. 어.. 설명하기 힘든데, 아뭏튼 저 차비가 없어요."

차비가 없다는 것은 아마 인류에게 차비라는 개념이 생겨난 이후로 고전적으로 걸인 건달들의 소재수단이어 왔을 것이다.

"500원이면 되요? 딱 500원이면 갈수 있으세요?"

"네. 딱 500원. ( <- 부끄러워서 막 울라그런다.)"

최근에는 상당히 그럴 듯한 (즉, 걸인이 아니라 실제 차비가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같이 보이는) 걸인도 많이 봐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었다. ^^;;;

난 주머니를 뒤졌다. 마침 나도 돈이 거의 없었는데, 집히는대로 꺼내어 보니 100원짜리 5개와 500원짜리 하나가 나왔다. 마침 수량이 딱 적절하길래 꺼낸 그대로 그녀에게 줬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상당히 민망해하며 쑥스러워하며 고마워하는 그녀. 뒤돌아 서려고 하다가 손바닥에 돈을 보더니,

"엇 근데, 500원짜리 섞여 있어요. 여기요."

라고 하며 돌려주려고 한다. 난 마다하며 말했었다.

"가지고 계세요. 일이 꼬이셨나분데, 액땜이 되서 이젠 문제 없을 수도 있겠지만, 한번 일진이 꼬이면 또 꼬일 수도 있으니..."

그녀는 아주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도착한 버스를 향해 총총 달려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참 꼴불스럽게 500원가지고 되게 선심쓰는듯 밸 소리를 다했던 것 같다.

그래. 미용사는 바로 그녀였다.

오늘 나에게 그 돈을 갚은 것인가 보다.. -_-;;;; 나에게 거스름돈을 더 준 것이다. 뭔가 모를 약간의 이자를 더 쳐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 확실한 것은...
나는 그 돈을 돌려 받게된 것이 그다지 기분 좋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보태서 받았다는게. 전혀 돌려 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돈을 돌려 받게 된 느낌은 어떻게든 썩 좋지는 않다. 게다가 서로 오간 대화의 내용도 일련 쌩깜의 연속이었으니...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그녀도 나처럼 기분이 나빴을라나? 그 남에게 구걸하듯 빚진 돈이 남아있다는 것이 기분이 나빴었고.. 오늘로 우연히 다시 만난것도.. 뭐 암튼 서로 피차 비슷한 입장이 된걸로 치면 되나?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간에...
나는... 머리가 긴 사람이 모자에 남기는 흔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무지하게 궁금하다. 정말정말 궁금하다.

__Enzoy____

Tags (관련 유사 이야기거리들) :

Trackback Address :: http://blog.enzoy.pe.kr/trackback/630


    Comment(s) :

Write a comment


<< : [1] : .. [625] : [626] : [627] : [628] : [629] : [630] : [631] : [632] : [633] : .. [694] : >>

광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