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의 도
enzoy : 쇠털나날/FunSeek - 웃음거리 : 1997/12/15 15:05글쓴 이 : 신동호 (rajas)
때는 1997년, 라자스는 2년간 열심히 논문을 복사해 오면 졸업장을 주겠다는 계약하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어느날 스승은 라자스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이 있어 2주일간 어디 좀 다녀올테니 그동안 이 논문들을 복사해 놓거라."
이렇게 던져준 종이묶음에는 엄청난 양의 논문 목록이 밑줄 그어져 있었다. 라자스는 즉시 일에 착수하여 하루에 3시간씩 5일 동안이나 복사를 했으나 아직 끝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열심히 복사를 하던 어느날 문득 복사의 도를 깨우쳤으니 스승께서는 이를 알게 하시려고 복사를 시키셨던 것이었다. 이 복사의 道를 혼자서 알기에는 너무 아까워 여러분들께 전해 드리고자 한다.
복사의 道(The Tao of Copy) written by rajas
1. 제자 : 복사의 道란 무엇입니까 ?
스승 : 다른 모든 것은 복사할 수 있되 자신만은 복사될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복사의 道이니라.
2. 제자 : 복사의 道는 언제부터 내려온 것입니까 ?
스승 : 옛날 천지가 만들어질 때 조물주 데미오르고스神은 이데아를 코라로 복사하여 우주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복사의 도는 천지장조 이전부터 있었느니라.
3. 제자 : 왜 복사의 道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까 ?
스승 : 복사본을 복사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복사본이 아니니라. 진정한 복사본은 원본과 구별됨이 없기에 복사본이라고도 복사본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것이 복사본이다'라고 말하는 즉시 그것은 道에서 멀이지는 것이다.
4. 복사맨 3인이 복사의 道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 때 옆에 있던 신도리코 복사기에서는 막 복사가되어 나오고 있었다.
복사맨1 : 이것봐라 글자가 복사되어 나온다.
복사맨2 : 아니다. 잉크가 복사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자 3번째 복사맨이 대답했다.
복사맨3 : 글자도 아니고 잉크도 아니다. 너희들의 마음이 복사되어 나오는 것이다.
5. 제자 : 혹시 복사맨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까 ?
스승 : 다음을 명심하거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복사맨으로 태어났으니, 안으로는 불법복사를 막고 밖으로는 해킹을 해 불법복사를 유통시킨다."
6. 제자 : 왜 하필 한국?복사의 道가 전수된 것입니까 ?
스승 : 한국은 예로부터 복사의 道가 흥했던 나리이니라. 다라니경의 인쇄를 비롯하여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바, 우리의 선조들은 복사의 道를 정확히 터득하고 계셨느니라. 다만 중간에 이 道가 끊어져 서양으로 넘어갔었는데 이제 바야흐로 민족 중흥의 기운을 타고 이 道의 중심이 다시 한국으로 넘어오고 있느니라.
7. 제자 : 하지 않음으로서 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
스승 : 옛날에 何不能複寫(어찌 복사하지 못하리요)라 이름하는 스님이 있었느니라. 그는 당대 최고의 복사맨으로 무엇이든지 다 복사할 수 있다고 알려졌느니라. 그의 명성을 듣고 한 사람이 직접 확인해 보고자 찾아와보니 정작 그의 집에는 복사기가 없었는지라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어 보았느니라.
"何不能複寫께서는 복사기도 없이 무엇을 복사하신다는 겁니까?"
"올 경제난으로 인하여 먹고 살기가 어려워 할 수 없이 복사기를 팔아 버리고 말았소. 그리하여 나는 복사하기를 멈추었소. 이제 내게는 복사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 어찌 복사 못할것이라도 있겠소?"
8. 제자 : 복사가 처음 시작된 때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 : 태초에 道가 있었느니라. 이 道가 하나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복사기였느니라.(道生一) 여기에서 다음 것이 나왔으니 이것은 곧 복사맨이었느니라.(一生二) 여기에서 다시 다음 것이 만들어 졌으니 이것은 곧 복사용지였느니라.(二生三) 이렇게 3자가 갖추어진 연후에는 만물이 여기에서 복사되기에 이른 것이니라.(三生萬物)
9. 어느날 스승과 제자가 함께 동해로 피서를 갔다. 그런데 스승은 그 무거운 복사기를 메고 피서지까지 왔다가 다시 그대로 메고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제자 : 스승님은 왜 복사도 안 하실 것이면서 그 무거운 복사기를 가져갔었습니까 ?
스승 : 道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만약 잠시라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道가 아니니라.
10. 옛날 초나라에 굴원이라는 복사담당관이 살았었다. 어느날 그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한 어부가 다가왔다.
어부 : 당신은 초나라의 복사맨 굴원이 아니오? 어찌하여 그렇게 수심에 젖어있소?
굴원 : 왕께서 불법복사를 명령했기 때문이요. 복사에는 道가 있는 것인데 어찌 복사맨으로서 불법복사를 할 수 있겠오 ? 차라리 이 몸을 기수에 던져 물고기밥이 될지언정 불법복사를 해 이 몸을 더럽히는 일은 차마 못하겠오.
어부 : 어찌 그리 생각하오. 그대가 말한 道란 다만 인간의 도에 지나지 않소. 만약 복사용지가 깨끗하면 복사용으로 쓰고 더러우면 이면지로 쓰면 되는 것이 아니오 ?
11. 문공이 방안에서 매뉴얼을 보고 있었는데, 뜰에서 복사를 하고있던 한 늙은 복사맨이 다가와 물었다.
복사맨 : 공께서 읽고 계신 책은 어떤 책이옵니까 ?
문공 : 옛 성인께서 지은신 매뉴얼이니라.
복사맨 : 그렇다면 공께서는 쓰레기를 읽고 계시는거군요.
문공 : 네 이놈이 어찌 천한 복사맨으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 도리에 맞는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죽을줄 알아라 !
복사맨 : 저는 평생 복사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복사라는 것은 인쇄농도를 너무 진하게 하면 온통 검게 나오고, 너무 흐리게 하면 글자가 희미해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농도를 같은 것에 맞추어 놓는다 한들 인쇄기가 나쁠 때에는 때때로 너무 진하게 나오거나 흐리게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최상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직관에 의존하여 이번에는 진할지 흐릴지를 판별하여 농도를 맞춥니다. 이 기술은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하나밖에 없는 자식놈한테도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매뉴얼을 보고 계신데 매뉴얼을 통해서 진정한 복사의 道에 이른자는 아직 없습니다. 오직 직접 몸으로서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12.
제자 : 복사맨의 세가지 즐거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 : 첫째, 때때로 복사하며 그것을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 둘째, 벗이 먼 곳에서 복사하러 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 셋째, 비록 교수님이 복사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다 한들 화내지 아니하면 어찌 군자답지 아니한가 ?
13.
제자 : 복사맨들에게도 道가 필요합니까 ?
스승 : 물론 필요하니라. 복사기를 함부로 다루지 아니하니 이것이 바로 仁이요. 친구의 복사부탁을 거절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바로 義요. 뒤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으면 잠시 차례를 양보해 주는 것이 禮요. 어느 복사기가 잘 작동되는지를 판별하는 것이 智이니라.
14. 복사가 되기 이전의 상태를 일컬어 中이라 하고
복사가 되어 나오되 원본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는 것을 和라 하느니라.
中과 和를 체득하면 비로서 만물이 여기에서 복사되어 나오느니라.
15. 옛날에 조물주가 복사기로 만물을 복사해 내고 있었는데, 혹시 자기를 복사하면 어떨까 호기심이 들어 복사기판에 자신의 얼굴을 대고 복사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간이었으니, 이로말미암아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16.
제자 : 복사의 어려움이란 무엇입니까 ?
스승 : 중간에 종이가 걸리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니라. 그러나 복사의 道를 체득한 자는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듯이 막히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 연속해서 복사되어 나오느니라.
17. 스승의 임종이 다가오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말을 전했다.
스승 : 이제 내가 떠날 날이 멀지 아니하니 각자 깨달은 바를 말해 보거라
복사맨1 : 어느날 문득 제가 복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스승 : 너는 道를 조금 알았느니라.
복사맨2 : 어느날 문득 제가 아닌 복사기가 복사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스승 : 너는 道에 가까우니라.
복사맨3 : 어느날 문득 저도 아니고 복사기도 아닌 복사가 복사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스승 : 너는 거의 다가섰느니라.
이 때 마지막 복사맨4는 아무말도 안한 채 복사기로 다가가 복사를 시작했다.
스승 : 너가 바로 복사의 道를 얻었느니라. 복사의 道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게 아니라 복사될 뿐인 것이니라.
18. 어느날 스승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읊어 주었다.
스승 :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복사실로가 복사를 한 번 해봐~ 나처럼 이렇게 가슴을 펴고~ 꿍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누구나 다 복사를 하다 보면은~ 마음먹은 대로 복사가 되지 않을 때도 있어~ 그럴땐 나처럼 복사를 해봐~ 꿍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19.
제자 : 복사의 道가 전수된 계보는 어떻게 됩니까 ?
스승 : 태초에 복사의 道가 있었느니라. 이 道는 '보사해'에게 전수되었고 그 다음에는 '또보사해'로, 그 다음은 '자꾸보사해'로, 그 다음은 '진땅보사'에게로, 그 다음은 '한장보사'에게로, 그 다음은 '何不能複寫'에게로, 그 다음은 '끄까지보사'로, 그 다음은 '보사그마해'로 전수되었느니라. 여기에서 道脈이 한번 끊어졌다가 '다시보사해'가 부흥시켜 '이것도보사해'로 이어졌다.
20.
제자 : 생명체의 탄생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스승 : 생명체는 부모들의 유전자 복사에 의해 태어나느니라.
21. 덕산스님이 복사기 매뉴얼이 적힌 청룡소초를 등에 매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시장에서 배가고파 찻집에 들렀는데 주인 노파가 말했다.
노파 : 당신이 등에 지고 있는 것은 최신 복사기 매뉴얼이 아니오 ?
덕산 : 그렇습니다.
노파 : 그렇다면 내가 문제를 내리다. 맞추면 공짜로 차를 드리고 맞추지 못한다면 돈을 내도 얻지 못할 것이오.
덕산 : 문제를 한 번 내보시죠.
노파 : 최신 매뉴얼에 의하면 '과거도 복사할 수 없다', '현재도 복사할 수 없다', '미래도 복사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당신은 무엇을 복사하시겠오 ?
22. 옛날에 어느 마을에 최고의 복사맨으로 알려진 '보사잘애'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어떻게 복사하는지를 물었다.
보사잘애 : 나는 복사를 하기전에 먼저 마음을 가다듬어 복사기와 나를 일치시킴니다. 그 다음에 복사기를 켜고 복사를 시작하면서 종이로부터 오는 잉크자국의 미묘한 느낌을 파악하며 복사를 합니다.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복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걸리는 바가 없어 수십년동안 이 복사기를 써 왔으나 한번도 고장난 적이 없었습니다.
23. 어느날 스승이 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복사할 종이를 이리댔다 저리댔다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제자가 물었다.
제자 : 스승께서는 복사의 道를 체득하신 분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머뭇거리십니까 ?
스승 : 道는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깊은 물을 건너는 듯,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 복사하는 것이 道이니라.
24.
제자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입니까 ?
스승 : 새로운 禪표 복사기를 팔러 간 것이었느니라.
25. 어느날 스승과 제자가 함께 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잉크(토너)가 다 떨어졌다.
제자 : 스승님 잉크가 다 떨어졌습니다.
스승 : 정말 그러하냐 ?
제자 : 예. 그렇습니다.
이 때 스승이 스위치를 누르자 마지막 한 장이 복사되어 나왔다. 그러자 제자가 문득 깨우쳤다.
26. 어느날 오후 스승이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스승 : 복사맨1아 차를 마셨느냐 ?
복사맨1 : 예. 마셨습니다.
스승 : 들어와 복사를 하거라.
스승 : 복사맨2야 차를 마셨느냐 ?
복사맨2 : 아뇨. 마시지 않았습니다.
스승 : 들어와 복사를 하거라.
그러자 복사맨3이 말했다.
복사맨3 : 스승님께서는 왜 차를 마신 사람이건 마시지 않은 사람이건 복사를 시키십니까 ?
스승 : 복사맨3아 ! 너두 빨리 들어와 복사나 하거라. 복사할게 아주 많으니라.
* * * * * * *
이렇게 라자스는 2년 동안 열심히 복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승이 불렀다.
스승 : 라자스야 이제 다 배웠느니라.
라자스 :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 전 지금까지 복사 빼고는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데요 ?
스승 : 아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네게 가르칠 것이 없다. 그러니 그만 하산하거라.
이렇게 말하며 졸업장을 하나 복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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